가끔씩 내 건망증을 의심할 때가 있다. 즐겨쓰는 향수가 냉장고에서 발견이 될 때가 있질 않나, 넥타이가 핑크팬더 인형의 목에 감겨있질 않나, 움직일 일이 없는 냉장고가 약간 비틀어 있질 않나.
거기 있어야 할 물건들이 거기 없거나, 약간씩 위치가 바뀌어 있는 경우가 요즘 자주 일어난다.
설령 술기운에 했다고 하더라도 예전에는 이렇질 않았는데, 새로 생긴 버릇인가? 하고 넘기곤 했다.
하지만 며칠 전 새벽에 그 이유를 알아냈다. 그건 내 건망증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번 자면 잘 깨지 않는데, 그 날 새벽엔 화장실이 급해 일어나 다녀왔다. 일을 보고 나오는 순간 방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뒤돌아 보았을 때 볼 수 있는 그 어설픈 정적이랄까?
신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가 갑자기 음악이 멈췄을 때의 어색한 침묵이랄까?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전날 자기전에 들었던 오르골의 위치가 약간 바뀌어 있었고, 팔짱을 끼고 있는 핑크팬더의 팔이 풀어져 있었다.
'오호라! 이것들이 움직이고 있었군!'
욕실에 다시 가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도마뱀들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보라색 도마뱀은 여기고, 노란색 도마뱀은 저기였는데!
"니네들 분주히 움직이며 놀고 있었다는거, 다 알고 있어. 내 말이 맞지? 어서 대답해!"
어색한 침묵.
"어쭈! 대답안해? 확 그냥 본드로 다 붙여놓기 전에 어서 대답해!"
책상 모서리에 위태롭게 걸쳐있던 녹색 슬라임 인형이 책상안쪽으로 삐질삐질 움직이며 대답했다.
"네 말이 맞아. 우리는 오늘 새로 온 로모카메라를 위한 환영회 중이었어. 내일 네가 출근한 후 하려했는데, 다들 오늘 하자고 해서 말야. 넌 자면 잘 안일어나잖아. 해서 다수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거든"
"그랬군. 그래도 니네들 너무했어. 이제껏 난 내 기억력만 의심했잖아. 이제야 모든게 다 이해가 가는군.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니네들한테 할 말은 해야겠어.
향수 너! 날씨가 아무리 덥다고 한들 아침 출근길에 있어야 할 자리에 없고 냉장고에 들어가 있으면 어떻게 해! 저녁에는 너의 도움이 없어도 되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아침에는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어줘! 아침 출근길에는 바쁘단 말야~
그리고 오르골 너! 대체 욕실에는 왜 간거야? 도마뱀들과 수다떨러 간거야? 네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이곳 저곳 찾지않도록 책상위에 있어줘!
도매뱀 니네들도 마찬가지야! 욕실 거울에 붙어있어야 할 니네들이 방 거울에 붙어있으면 어떻게 해! 아무리 생각해도 니네들을 거기 옮겨놓을 이유가 없는데 이상하다 했잖아. 술기운에 그랬나보다 하고 넘겼지만 다음부턴 어림없어~!
별들은 내가 잘 때 방을 돌아다니며 빛을 발해도 좋아. 그리고 구름도 내가 출근 후 둥둥 떠돌아 다녀도 좋아. 하지만 내가 집에 돌아올 때 쯤엔 제자리에 있어줘.
아 참! 쏘세지 너! 아무리 목욕이 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마시는 식초에 몸을 담그면 어떻게 해! 상한줄 알았잖아! 퇴근 후 맥주한잔 할 때 네가 필요할 수 있으니 내가 출근하고 난 후 목욕을 하고 잘 말려놓든가, 아니면 생수에 목욕을 해줘!
냉장고와 TV! 니네들은 움직일 때 조심해 줘! 장판에 상처라도 나면 안되니까.
마지막으로 니네들 모두에게 한마디 할께. 항상 그 자리에서 고정된 시선으로 있으면 답답하다는거 이해해. 그러니 내가 잘 때나 집에 없을 때는 축제를 해도 좋아. 하지만 내가 집에 돌아올 때쯤엔 어디있는지 찾는다고 시간을 소비하지 않게 내가 자리를 배치해 준 그 곳들에 있어줘. 알았지?"
"응" "그래" "알았어"
이 곳, 저 곳에서 내 협상안을 받아들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후로 내 방엔 평화가 찾아왔다.
이젠 더 이상 핑크팬더가 꼬고 있는 다리의 위치가 바뀌거나, 유리창에 붙어있는 야광별이 오리온 자리에서 북두칠성으로 바뀌어도 신경쓰지 않는다.
혹시 당신집에도 물건들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거나, 상상치도 못한 곳에서 물건들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질 않나?
자신의 건망증을 의심하기 전에 먼저 물건들과 대화 해보기를 권한다.